경동유재원클라이밍센터/클라이밍일반

어느 청년 알피니스트의 삶과 죽음

경동유재원클라이밍 2019. 12. 31. 17:42

<글 박소라 기자, 사진제공 : 손경석 한국산악회 원로회원>

 

1972년부터 5년간 알피니즘의 고향 샤모니에서 한 시대를 불태웠던 유재원.

알피니즘의 발상지인 프랑스 샤모니 한 귀퉁이, 만년설산이 굽어보는 그곳엔 산악인 묘지가 있다. 에드워드 윔퍼, 리오넬 테레이, 모리스 에르조그..., 한 시대를 풍미했던 알피니스트들의 체취가 남아있는 이곳에서 익숙한 이름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그 묘비명은 이렇다. YU JAE WON, Face Nord Aiguille Noire de Peutherey, COREAN JUILLET 1997) 유재원, 에귀 노아르 드 프트리 북벽, 한국인 1977년 7월). 그는 왜 이 머나먼 땅에 몸을 뉘었나.

 

유재원은 1972년 몽블랑 뒤 따귈 '코리안 필라' 코스를 초등반하는 등 5년간 23회의 공식 등반 기록을 비롯해 수많은 등반활동을 펼쳤다. 또 1974년 프랑스 히말라야 원정대, 이듬해에는 인도 히말라야 눈 쿤 원정대와 파키스탄 낭가파르바트 원정대 대원으로 선발되기도 했다. 그러나 귀국하지 않는 그들로 인해 문교부로부터 질책을 받은 한국산악회가 비자 연장 불허 신청을 낸 뒤라 여권 문제로 참가하지 못했다. 

 

유재원의 활동 소식은 당시 등산잡지와 한국산악회 회보를 통해 국내에 간간히 소개되었다. 자신의 등반기에서 '클라이머는 등반이 아무리 힘들고 괴로웠어도 절대로 후회한다는 법은 없다. 그러므로 다시 더 큰 등반을 두려움 없이 떠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경험은 클라이머를 더 큰 산으로 보낼 뿐'이라고 했던 유재원. 그는 1977년 7월 23일 일본 산악인 마사오(당시 28세)와 에귀 노아르 드 프트리 남벽을 등반하러 떠난 뒤 실종돼 다음 달 8일 북벽 아래에서 유해로 발견되었다. 

 

왼쪽부터 차양재, 손경석, 유재원

 

시대의 불운을 열정으로 바꾼 알피니스트

유재원은 1962년 경동고등학교 산악부에 가입하며 산악활동을 시작했다. 1969년 경희대학교 미술교육과를 졸업하고 1970년 경동고 동문산악회 회장을 지냈으며 같은 해 한국산악회에 가입했다. 이후 한국 등반기술연구회(KCC) 간사와 한국산악회 편집 문헌 위원으로 활동하던 유재원은 알프스로 떠났다. 당시 넉넉지 못한 자금으로 떠난 그들은 교육이 끝난 뒤 코앞의 봉우리조차 오를 수 없는 형편이었다. 1972년 한국산악회 회보에 실린 김인섭 대장의 보고서에는 '오늘도 기다리는 생활비는 오지 않았다. 예산이 없어 맑은 하늘에 깨끗하게만 보이는 샤모니 침봉을 쳐다보기만 하는 우리들 신세가 안타깝기만 하다'며 당시 절박했던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해 독일 대사관까지 찾아가는 등 갖가지 노력을 했지만 결국 그들은 한꺼번에 귀국할 수 없는 상황임을 깨달았다. 먼저 김인섭 대장이 귀국하고 남은 세명의 대원은 파리에서 귀국할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농장이나 공장 등지에서 일자리를 얻었다. 곧 김항원 대원도 귀국했으나 유재원과 차양재는 돌아오지 않았다. 

 

국내에서부터 유재원과 가까웠던 손경석(한국산악회)씨는 그를 두고 '진정한 산악인'이라고 표현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여자도 모르고 오로지 산과 기타밖에 모르던 순박한 사람'이라고 유재원을 기억했다. 손 씨는 '1975년 한국산악회에서 안나푸르나 원정대를 꾸릴 당시 그를 초청했는데 '나는 어려움과 싸우며 올라가겠습니다. 히말라야도 좋고 산의 높이도 좋지만 샤모니의 침봉을 눈앞에 두고 갈 수 없습니다. 그 침봉을 하나하나 다 오를 때까지 돌아가지 않겠습니다.'라고 답했다며 이미 그 시대에 등로주의를 추구했던 산악인이라고 말했다. 또 '1974년 여름 UIAA 총회 참석 후 들른 샤모니에서 유재원을 만났을 때 띠띠 할아버지의 산장에서 지내던 그의 방에는 벽면 가득히 커다란 태극기가 걸려 있었고 등산장비로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며 '샤를레 모제에서 일할 때도 자기가 만든 장비에는 꼭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을 만큼 자존심이 강했던 사람'이라고 회상했다. 

 

유재원은 단순히 행위에 그치는 산악인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등반을 꼼꼼히 기록하고 미술학도로서의 재능을 살려 수많은 사진을 찍었다. 그의 경동고등학교 산악부 후배인 조성대 씨는 '사고 이후 2주기를 맞아 추모 사진전을 ㄹ열 때 그가 남긴 사진만 해도 수백여 장에 달했다'며 '본인이 돌아오면 영국의 <마운틴> 같은 등산잡지를 만들고 싶어 했다' 고 증언했다. 조 씨는 그가 남긴 산행 노트를 정리해 등산잡지에 발표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사진들은 여기저기 흩어져 대부분 유실됐다. 

 

6개월짜리 단수여권 기한이 지나면서 유재원은 무국적자가 되었다. 이는 냉전시대를 살며 그 시대의 젊은이가 온몸으로 견뎌야만 했던 현실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국에서의 어려운 생활 가운데서도 등반에 대한 열정만큼은 식을 줄 모르고 뜨거웠다. 1973년 수기에는 '파리에서의 나의 생활은 상당히 어려운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다음 시즌의 알프스 등반을 위하여 몸을 굳혀두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파리 근교에서 계속 클라이밍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라고 나와있다. 그해 2월 프랑스 산악회(C.A.F)에 등록해 정식 회원이 된 그는 클라이밍 강사인 크리스티앙 본에와 함께 매주 일요일마다 퐁텐블로 주위에 흩어져 있는 암장들을 돌아다녔다. 이때 유재원은 '이러한 벽들은 평야지대의 낮은 단애에 불과한 것이어서 나에게는 언제나 알프스에 가야만 한다는 충동이 일고 있었다'며 알프스행을 갈망했다. 

 

여름이 되자 샤모니로 달려간 유재원은 훈련대 교육 당시 몽블랑 노멀 코스를 오른 것 외에는 알프스에 대해 아는 것도 별로 없었고, 차양재가 파리에 남아있어 같이 등반할 파트너도 없었다. 하지만 '나의 알프스 등반이 이렇게 두려움 속에서 시작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나 최소한 부딪쳐 보지도 않고 포기한다는 것은 나의 주의에 알맞은 것이 아니다' 라며 등반 의지를 굽히지 않았다. 

그러나 '엄청나게 드는 생활비와 등반비를 마련하기 위하여 대부분의 나날을 일터에서 노동을 해야 하고 휴일이면 일에 지친 몸으로 산을 오르는 일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다'는 유재원은 낯선 타지에서 생활이 힘겨웠다고 전해진다. 손경석 씨는 '재원이가 눈물로 밤을 새우며 내게 힘들게 지낸 생활에 대해 들려줬다'며 '부유한 집안의 4대 독자이던 그가 접시닦이를 비롯해 푸줏간에서 일하는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라고 말했다. 

 

유재원의 삶에서 무엇을 볼 것인가

 

이후 유재원은 1974년 띠띠 할아버지와 당시 샤모니 시장의 도움으로 거주 증명과 노동 증명을 받아 등반장비업체인 샤를레 모제에 취직할 수 있었다. 하루 8시간 꼬박 노동을 해야 하는 생활 속에서도 그는 그랑샤르모 북벽, 당 뒤 제앙 남벽 등을 단독 등반하는 등 눈부신 등반활동을 펼쳤다. 이 무렵 프랑스 국립 스키 등산학교의 초청으로 1년여간 샤모니로 유학을 떠났단 문길남 씨는 '산 얘기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등산 욕심이 유난하던 사람'으로 유재원을 떠올렸다. 또 '내가 알프스에 도착하자마자 마땅한 파트너가 없었기 때문인지 바위부터 하자고 끌고 가 밤낮 바위만 하러 다녔다.'라고 말했다. 유난히 단독 등반 기록이 많았던 유재원은 76년 드류 북벽 등반기에서도 '이렇게 멋있는 등반을 우정을 나눌 수 있는 한국인끼리 할 숭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라며 이국땅에서 홀로 떨어져 외로운 마을을 비추기도 했다. 

 

유재원은 75년 몽블랑 뒤 따귈 등반기에 '나는 언젠가는 등반을 하다가 죽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며 자신의 등반활동을 일컬어 '죽음의 국경 앞에서 비자를 내보이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언제나 죽음을 각오한 듯 샤모니의 침봉을 오르던 그는 로제 듀프라의 시 '만일 내가 어느 날 산에서 죽거든'을 기타 가락에 맞춰 자신의 삶과 같은 노래를 즐겼다. 결국 그가 말한 죽음 앞의 비자는 77년 7월로 기한이 만료됐다. 에귀 노아르 드 프트리에서 조난 사하기 직전 한국에 보내온 편지에 '돌아오는 겨울에는 프랑스 국적을 얻을 자격인 5년을 경과하게 되므로 앞으로는 생활이 좀 나아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습니다. 이번 여름 등반 플랜 중에는 알프스 최난 루트의 초등반을 할 계획이 들어 있으며 8월에 아이거 북벽 등반 등이 끼어 있습니다'라고 밝힌 뒤였다. 조성대 씨는 '한덕정(동국대 산악부 OB)씨와 마지막으로 오간 편지에 의하면 한 씨가 미술 디자인을 더 공부하라는 권유를 하자 뉴욕에 가서 공부를 하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며 '장례를 치른 이후에 노동 허가서와 영주권이 나왔다는 말을 들었는데 아마 미국으로 갈 생각이었던 것 같다'라고 추측했다. 

 

그로부터 꼭 그가 살아간 나이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조 씨는 '그야말로 불처럼 살다 간 유재원 선배가 샤모니에서 이룬 활동은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산악인들에게 유재원의 삶이 시사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가 남긴 에프 롱 브렌바 등반기에서 발췌한 글로 '어느 청년 알피니스트'가 외쳤던 음성을 대신하고자 한다. 

 

'알피니스트에게는 등반을 위해서 자기의 일부를 포기하거나 희생한다는 것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ㄴ일생의 가장 중요한 젊은 시절을 그리고 나의 모든 것을 알프스의 산들을 위해서 바쳤으며 그것 때문에 아직까지도 어떤 학대를 견디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조금도 후회하지는 않는다'

 

유재원이 생전에 제작한 설악산 천불동 개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