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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벽등반/외벽암벽 등반실전

[산행기] 잊을 수 없는 고독길 동계 등반

by 경동유재원클라이밍 2021. 3. 22.
성북K클라이밍 까페에 등록한 정문근 회원님의 등반기를 함께 공유합니다. 

8시 집합.

아침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언제나 30분씩 일찍 오시는 영일쌤과 선생님은 10분이 지나도록 오시지 않았다...

설마 항상 하던대로 9시인가.

화장실을 갈까말까 고민하는 찰나,

15분에 도착하셨다.

도선사 주차장까지 오는 택시는 4명이 탑승해야 출발한다.

사람없는 겨울 산행, 영일쌤은 무려 30분을 택시에서 기다리셨다고 한다...

어쨋든 안좋은 컨디션을 해결하지 못하고 어프로치 시작.

다리가 영 무겁다.

하지만 해볼만 하다고 생각했다.

항상 가던 길이었으니까.

그런데... 고독길 시작점이 이렇게 길었었나...?

저 언덕뒤가 바로 시작이었던것 같은데.

아... 언덕이 하나 더 있네...

겨울의 고독길

처음 해보는 동계 등반.

쉽기만 했던 길은 얼음과 눈으로 뒤덮혀있고

둔탁한 빙벽화는 굽혀지지도 않는다.

마치 탱크를 신고 등반하는것 같다.

고독길 시작 지점에 도착하자 큰 짐을 덜어낸것 마냥 후련해진다.

그래 고독길이면...

어프로치(시작지점까지 가는것)반 등반 반이지.

등반은 어려울것 없다 생각했다.

착각했다.

내가 신고 있는 게 탱크라는 것을...

지금은 영하 10도라는 것을...

 

고독길 개념도. 겨울엔 의미 없는 난이도다.

사람은 아무도 없다.

사람의 흔적도 없다.

자일이 움직이는 소리와

몰아쉬는 숨소리 밖에 없다.

아.

센터장님께서 저렇게 힘들게 올라가실 정도면...

난 이제 죽었구나.

첫 1피치부터 힘이 주욱 빠진다.

컨디션 탓이라고 하고 싶다.

하지만 실력탓이다.

발은 어디를 딛을지 모른채

하염없이 미끄러진다.

평소와는 생판 다른 1피치를 끝낸 후, 2피치는 그래도 할만했다.

모두가 할만했다.

모든 장비를 회수해야하는 영일쌤을 제외하곤 말이다.

등반 마지막에 가서야 겨우 사진을 찍어드린 영일쌤. 후등자는 외롭다.

문제의 3피치.

이건 또 새롭다.

처음으로 후등자 빌레이가 아닌 안자일렌으로 등반했다.

몇일 전 동계 등반에 대해 센터장님께서 말씀하신게 떠오른다.

"안전과 속도는 상극이야, 하지만 동계 등반은 빠른게 곧 안전이야!!"

얼음과 눈을 피해서 발을 디딘다.

사진 찍을 여유 따윈 없다.

그래... 그래도 할만하니까 시키시겠지...

우릴 믿는 센터장님을 믿는다.

올라간다.

겨우 올라갔다.

4피치만 끝내면 영자크랙.

정상에 다 온거나 마찬가지다.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의 진정한 크럭스는 영자크랙인줄은 모른채...

오늘의 등반이 전체적으로 그랬듯 평소의 4피치 같지 않은 4피치를 끝내고 영자크랙 직전 휴식 장소에서 다들 한숨 돌린다.

계속 음지와 얼음에서 바람을 맞으며 등반해 영자크랙의 따뜻한 햇빛이 마치 봄날같다.

"여기 따뜻하니까 다들 몸 좀 녹이고 가자고."

하지만 고독길은 우리에게 이제 쉬었으니 빨리 일어나라고 재촉하듯,

해를 5분 내에 감춰버리고 바람을 선물했다.

"센터장님... 해도 없어졌는데 가죠..."

"그래..."

영자 크랙.

5번은 미끄러지고 마지막은 엎드려 기어갔다.

영일쌤이 회수하면서 올라오시지만 마지막 캠(등반장비)이 빠지지 않는다.

"으아아악! 안빠져요!"

영자크랙은 비명소리로 가득찬다.

"기다려봐!"

센터장님이 내 가방에 매달려있던 날카로운 바일을 빼가서 내려가신다.

센터장님이 도구를 사용해야 될 정도라면... 상황은 심각하단 뜻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캠은 빠질 생각조차 없다.

'우리끼리 캠(15만원) 비용 분담해드려야겠다...'

체념하는 사이,

환희의 소리가 들린다.

"야 뺐어!!"

20여분의 사투끝에 마침내 승리.

역시 센터장님.

캠을 빼내는데 사용한 바일.

영자크랙을 마치고 마지막 피치인 참기름 바위.

'그래 이것만이라도 잘해보자...'

온 정신을 집중해 겨우 오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깔끔하게 해냈다.

하지만 그걸 즐길 여운은 없다.

정상은 칼바람이 불고 하강하는 바위쪽은 더한 바람이 분다.

힘들었던 동계등반중에서도 가장 심리적으로 위축되었다.

날카로운 바람의 소리는 항상 하던 하강임에도 긴장시켰으며,

강한 바람은 몸 마저 흔들어대 평소라면 확보줄을 걸지 않는 곳에서도 확보줄을 걸게 했다.

영일쌤이 먼저 내려가셨지만 평소와 달리 너무 오래 걸리셨다.

그것 또한 심리적으로 위축되게 했다.

항상 센터장님이 하신 말씀이 떠오른다.

"하강을 즐기면 안돼!!"

...이 상황에서 하강을 즐기는 사람은 머리가 이상해진 사람뿐일 것이다.

영일쌤은 자일이 바일에 걸려 빼내느라 오래 걸리셨다고 했다.

새삼 산의 위험성을 깨닫는다.

하강 지점.

자일이 살짝 얼어붙어 길고 힘든 하강이 되었다.

'이젠 두발로 등산로로 걸어 내려갈 수 있겠구나...'

하강을 끝낸 후 수직의 세계에서 수평의 세계로 도착했다는 안도감과 함께 긴장이 풀린다.

하지만 이후 센터장님께선 바람에 날아간 자일을 잡으러 가시며 프리솔로(로프없이 하는 등반)로 등반을 하셨다...

"릿지화(등반용 신발) 가져온게 다행이네."

역시 리더는 아무나 하는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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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우여곡절 모든 등반이 끝나고 마음 편하게 등산로를 따라 내려올 수 있었다.

동계 선등을 서신 센터장님에게 새삼 감사하다.

하산 후 식당에 가자 등산객들이 물어본다.

"백운대 다녀오셨나봐요?"

"아니요 인수봉 다녀왔어요."

탄성이 터져나온다.

동계 "자유"등반.

어떤 등산학교에서도 하지 않고 들어본 적도 없다.

겨울이라는 환경에 대비하고 눈 덮인 암벽을 올라가는것.

더 높은 곳을 올라가기 위한 초석이지 않을까.

이렇게 강렬한 등반은 평생 못 잊을 것이다.


[출처] [산행기] 잊을 수 없는 고독길 동계 등반 (성북 K · 경동 클라이밍) | 작성자 정문근